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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2주기. 만화책속에 담긴 실화 같지 않은 이야기 - "용산개 방실이, 내가 살던 용산" 본문
오로지 만화 이야기뿐/만화 읽어주는 남자
용산참사 2주기. 만화책속에 담긴 실화 같지 않은 이야기 - "용산개 방실이, 내가 살던 용산"
☆북극곰☆ 2011. 1. 20. 09:13만화책 읽어주는 남자입니다.
용산. 어릴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게임기를 구입하기 위해서 자주 갔었던 곳이 바로 용산이다. 한번 들으면 기억하기도 쉬웠던 "용산"은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게임기를 마음껏 구경하고 살수 있었던 곳이었다. 때로는 불법복사비디오를 구경하기도 했고 때로는 친구들과 핫도그를 사먹기도 했으며 때로는 불량배들을 만나서 돈을 뺏기고 얻어 맞기도 했던 곳, 그당시 나같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놀이공원보다 재미있었고 만화영화를 보는 것보다 두근거렸던 곳이 용산이다. 그 후 성인이 되고 나서는 가전제품이나 컴퓨터등을 구입하기 위해서 자주 찾았던 곳 또한 바로 용산이다. 집에서 버스타고 10분거리밖에 안되었던 용산은 나에게는 아니,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곳일런지도 모른다. 홍등이 낮이나 밤이나 환하게 켜있던 역 뒷편의 집창촌도 낯설지 않았던 그곳이 바로 용산이었고 술을 마실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서 단골집이었던 원조감자탕집이 있던 곳도 용산이었다. 내가 살던곳이 용산은 아니었지만 용산은 이미 나에게 친구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용산은 "내가 살던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용산참사 2주기를 맞이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1년여 되던날, 언론에서는 용산참사피해자 유족들과 정부가 극적으로 타결했다고 이곳저곳에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2010년 11월 11일, 대법원은 농성현장 철거민 9명에게 징역 4~5년형을 선고했다. 바로 그날, 대법원 근처에서 G20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말 웃긴 일이다.
용산참사에 열을 내는 사람들은 우리같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철거민들을 "테러리스트"라고 칭하기까지한 일부언론의 감언이설에 속아 용산참사는 "보상금이나 더 받아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참극"이라고 까지 치부하고 무관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이다. 단순히 "철거지역에서 농성하던 철거민 5명이 사고로 죽었다."라고 결론짓기에는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은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짚어 쓰고 아직도 억울한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용산참사의 실화같지 않은 실화를 전하려고 하는 움직임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시도되었다.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르겠지만 만화계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작년, "내가 살던 용산"이라는 제목의 만화책이 여섯명의 만화가에 의해서 집필되었다. 직접 만화가들이 용산참사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을 만나서 그들의 과거이야기부터 현재이야기까지 빠지지 않고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을 만화로 옮긴 작품이다. 그렇게 1년후 2011년. 용산참사 2주기에 맞추어 용산참사 희생자중의 한명인 故양회성씨의 반려견이었던 "방실이"를 소재로 한 "용산개 방실이"라는 만화책이 출간이 되었다. 이 만화책 또한 작가가 직접 유가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후에 만들어진 책이다. (참고로 이 두권의 만화책들은 용산참사라는 이슈를 이용하여 또하나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려는 책이 아니다. 두권의 책 모두 재생종이로 만들어졌으며 책의 수익금과 작가의 인지세 일부를 용산참사에서 희생된 유가족들과 관련 대책위원회에 지원하고 있다.)
이 두권의 만화책은 "용산참사"의 믿기지 않는 실화를 그대로 기록하고 보여주는 책이다. 만화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런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화책은 더욱더 그렇다. 이 만화책을 읽은후에도 "용산참사는 철거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대형참사" 였다고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치부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기억하자. "용산은 그리 먼곳에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살고 싶었을 뿐이다."
▶◀ "내가 살던 용산"
만화가 6인이 직접 발로 뛰면서 용산참사에서 희생된 고인들의 유가족들을 만나 생생한 그들의 증언과 이야기를 토대로 한 만화책이 바로 "내가 살던 용산"이다. 평소 사회에서 소외받거나 약한자들의 이야기를 만화속에 그려내는 것에 익숙한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신성식. 앙꼬, 유승하" 선생님들이 집필한 이책의 발매일은 2010년 1월이다. 당시 "용산참사"에 대하여 정부와 정운찬총리가 사과를 하느냐 마느냐 하던 시기였으며 고인들이 희생된지 1년여만에 장례절차를 치르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해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과거의 사건과 사고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며 새로운 정보들과 뉴스들로 채워져 나간다. 하지만 시대에 역행하는 비인도적인 행위가 명명백백했던, 민주주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참사가 2009년 1월에 발생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작은 소망에서 시작하고 진실을 전달하고 싶었던 만화가들은 분명히 잊지 않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용산개 방실이"보다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사실적인 사건들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된다. 하지만 당시에 "용산참사"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리고자 했던 유가족들과 만화가들의 외침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해서 이야기속에 빠져들다보면 한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미간을 찡그리고 만다. "이게 진짜야? 이게 대한민국이야?" 하면서....
[1화: 철거민_김수박]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던 그래서 인정이 많다 못해 넘쳐나서 이웃들과 함께 나누었던 고 윤용헌씨의 이야기로 첫장을 열게 된다. 유가족들이 철거기간동안 용역깡패들의 행패와 경찰들의 무관심때문에 얼마나 힘든 시간들을 보냈는지 생생하게 그리고 있으며 그의 얼울한 희생에 대한 또렷한 증거와 증언들을 구체적으로 전해준다. 바로 유가족들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2화: 잃어버린 고향_유승하]
철거민대책위원회를 결성했던 고 한대성씨. 용산에서 일어나고 있던 철거민 강제이주 현장에 자신의 지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사람들끼리 함께 해야 한다고 하여 참여하였다가 사고를 당하고 만다. 가족들과 함께 소박하게 살고자 했던 그의 조그만 행복의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3화: 던질 수 없는 공_신성식]
계속되는 실패의 연속에서도 꿋꿋하게 가족들과 행복을 꾸려왔던 고 양회성씨. 두 아들들과 함께 일식집을 꾸리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상한듯한 말을 가족들에게 남기고 2009년 1월20일 새벽에 사망했다. 그의 반려견 "방실이"는 고 양회성씨의 죽음이후 식음을 전폐하다가 곧이어 그를 뒤따라갔다고 하여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4화: 레아호프, 그들이 만든 희망_김성희]
용산에서 아들, 며느리와 함께 "레아호프"를 운영해 왔었다. 아들내외와 함께 옥탑에서 살고 있어도 용산의 활기찬 모습과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꼈었다고 하는 그는 다른 철거민들과 함께 2009년 1월 20일 새벽에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인해서 눈을 감고 말았다. 만화책속에서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레아호프"를 만드는 과정부터 사건당일날까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5화: 상현이의 편지_앙꼬]
두번이나 철거경험이 있기 때문에 철거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고 이성수씨. 그의 아들인 상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용산참사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주된 이야기이다. 천막에서 살긴했지만 함께 할수 있어서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상현이의 공허한 눈빛은 만화책을 읽고 있는 내내 머릿속을 멤돌았다.
[마지막화: 망루_김홍모]
이 만화책의 마지막이야기인 "망루"는 농성현장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故 이상림씨의 아들 "이충연"씨가 감옥안에서 만화가에게 2009년 1월 20일 당시의 생생하고 리얼한 이야기를 편지에 적어 보내준 글을 토대로 구성되어 있다. 용산참사와 관련된 만화책을 만들겠다고 감옥안의 "이충연"씨와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또 나누고 또 나눈 결실이 바로 "내가 살던 용산"이 되었고 "망루"라는 제목의 만화가 된 것이다. "망루"에는 위에서 한명씩 소개된 "故 윤용헌씨, 故 한대성씨, 故 양회성씨, 故 이상림씨, 故 이성수씨"가 모두 등장하여 그들의 마지막 목소리와 외침을 모두 들려주고 있다.
"살려고 올라왔는데 설마 죽기야 하겠냐"며 서로를 위로하던 그들, "내려가면 시원하게 한잔하자."던 그들, "집에 놓고온 가족들이 걱정된다." 던 그들, "가족들과 함께 이대로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던 그들. 정부고, 경찰이고, 지역단체고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자 마지막 수단으로 올라갔던 망루는 너무나 큰 희생을 댓가로 바랬었나 보다. 그들은 단지 살고 싶었을 뿐인데......
사람은 당연히 행복을 추구하고 사람답게 살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용산에는 그것이 없었다. 그들을 강제이주 시키고 그들 삶의 터전을 강제철거하려고 마음먹은 윗분들 머릿속에는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이렇게 다 함께 "레아호프"에 모여서 시원하게 맥주한잔을 하고싶었던 것이 그들이 원하는 행복의 전부였을 뿐이다. 가난하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정직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큰 욕심이 없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나라는 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 그게 어쩔수 없는 일이고 경쟁사회의 섭리라면 왜 "착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가르치는가? "내가 살던 용산"의 마지막페이지에는 위 사진과 같이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이 함께모여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던 꿈을 만화로나마 실현시켜주면서 마무리 된다.
▶◀ "용산개 방실이"
2011년 1월초. 2년전 용산참사로 인해서 희생된 "故 양회성"씨의 반려견이었던 "방실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만화로 그린 책이 출간되었다. 두툼한 두께의 재생종이와 "수익금과 작가 인세의 일부를 故 양회성씨의 유가족들에게 지원합니다."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있는 이 책은 "故 양회성씨"의 죽음이후로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24일만에 그를 따라서 하늘나라로 올라간 "방실이"의 실화 이야기이다. "방실이"라는 강아지를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들이 주를 이루기는 하지만 이 만화는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방실이"의 아빠였던 "故 양회성"씨를 다시한번 기억하고 그 끔찍했던 현장을 어떤식으로든 잊지 말아야 한다는 작가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반려견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우리이웃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1년먼저 출간된 "내가 살던 용산"에 비해서 리얼리티면에서 약간의 설정과 구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반려견 "방실이"의 일화와 그 강아지를 "딸"이라고 불렀던 "故 양회성"씨의 모습은 사실이며 만화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격앙되고 사실전달위주의 목소리보다는 차분하고 안타까운 느낌을 전해주고 있는 이 만화책속의 "방실이"는 똑똑하고 현명한 강아지였다.
"인간과 반려동물이 만나는 일이 다 그렇듯 방실이도 운명처럼 우리 가족이 됐다. 미리 정해져 있던 일처럼.... (본문중)"
우리내 아버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양회성"씨도 "동물"을 굉장히 싫어했다. 주인에게 어리광만 부리고 아무곳에나 똥과 오줌을 싸놓으며 먹기만 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그닥 호감을 표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항상 반려견 "방실이"만 챙기는 부인에게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강하게 "방실이"를 거부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았을때 이미 "양회성"씨에게는 "방실이"를 딸로서 받아들일 준비가 마음속 깊은곳에 자리잡고 있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집안에서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남편이자 아버지였지만 따뜻한 마음과 가족을 생각하는 배려심만큼은 말하지 않아도 표현하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고 "양회성"씨의 아내는 회상한다.
"방실아 아니? 아빠는 비오는 날이 제일 싫어. 비가 오면 손님이 없거든 (본문중)"
"아빠"는 "방실이"를 귀찮아하고 싫어했지만 "방실이"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진짜 "아빠"를 만난것처럼 처음부터 "양회성"씨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항상 매서운 눈빛으로 "방실이"를 쳐다보던 "양회성"씨 곁에서 함께 소주도 들이키고 어리광도 부리고 귀여운 눈빛을 보내는 등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갔던 것이다. 그런 "방실이"의 노력때문일까... "양회성"씨는 서서히 마음의 문을 "방실이"를 향해서 열어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웃었다....방실이 덕분에.... (본문중)"
방실이를 "딸"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와 용산의 상가들이 철거될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고 실제 용역인부들과 감정평가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던 시기는 일치한다. 이 시기, 누구보다도 마음앓이하고 힘들었지만 자신을 의지하고 믿어주는 가족들에게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은 "양회성"씨에게 "방실이"는 든든한 응원자이자 "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개를 싫어하던 양반이 "방실이" 없으면 못살것 같이 변해버렸다는.... 사람이 변하면 죽을때가 된것이라고 얘기했다던.... "양회성"씨 부인의 독백이 가슴아프다.
"아빠는 이제 방실이 없으면 못 산다.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자. 방실아. (본문중)"
새로운 딸인 "방실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예전보다 더 행복한 삶을 꿈꿔오던 "양회성"씨는 하루하루 힘들어져만 가는 생활과 용역인부들, 경찰들의 횡포에 날이 갈수록 근심걱정마나 늘어가고 결국에는 정부단체 어느곳에서도 자신들과 대화하려고 하지 않자 마지막 선택으로 "망루"에 올라가게 된다. "잘갔다 온다."고 손을 흔들면서 집밖을 나서던 "아빠"를 다시는 못볼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방실이"는 했었을까? 유독 "멍멍"하면서 크게 짓던 방실이었다. 항상 "아빠" 품안에 안겨있던 "방실이"는 "양회성"씨의 "딸"이었기에 가족모두와 함께 슬픔의 늪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방실이가 죽고 가족은 방실이를 바로 화장하지 못했다. 따라 죽을만큼 사랑했던 아빠와 합장 해주고 싶어 냉동고에 보관했다. 하지만 곧 치룰줄 알았던 아빠의 장례는 계속 미뤄졋고 마냥 기다릴수 없어 따로 화장해 보내줬다. 아빠와 방실이가 따로따로 냉동고에서 시간을 보내는 참담한 상황. 결국 합장도 하지 못했다. (본문중)"
아빠가 돌아오지 않자 먼곳으로 떠난 것을 아는 듯 "방실이"는 그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억지로 먹여도 토해내기를 반복하며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갔다. 아빠가 죽은지 24일째 되던날, 마지막으로 아빠 영전앞에서 인사하듯 멈춰있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엄마"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거짓말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용산참사" 이후에 일어났던 실화이며 당시 일부 언론에서도 다룬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무엇이 "방실이"를 그렇게 슬프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무고한 생명들을 이토록 잔인하게 앗아갈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일까?"2008년 12월 29일. 용산 철거민 대책위 송년회. 남편의 손을 잡고 췄던 처음이자 마지막 춤. 남편 손을 통해 느껴지던 따스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본문중)"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함께 떠난 "양회성"씨와 "방실이". 훗날 눈을 감는날 이 둘이 마중을 나왔으면 좋겠다는 "양회성"씨부인의 눈물섞인 말은 이 책을 읽고 있었던 나에게 많은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는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들에 피해받고 고통받으면서 살지 않기를 바라며....
▶◀ 오랫동안 기억되야 하는 용산참사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과거의 정보는 떠밀려 튕겨져 나가고 만다. 하지만 영원히 기억되어지고 기억해야하는 일이 한두가지씩은 있기 마련인 것이 사실. 비단 용산참사의 비극과 희생을 유가족들만이 짊어지고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받은 고통과 슬픔은 상상할수 없을 만큼의 큰 것이기에 그 기억을 조금씩이라도 거들어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 매년 1월20일만 되면 울음을 멈출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생활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 오히려 용산참사 철거민들을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 하던 여론들, 약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자들이 짓밟아 버린 철거민들이 원했던 소통과 대화의 길.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고 챙겨주지 못한, 용산이라는 공간을 어렸을때 부터 익숙하게 생각했을뿐 이들의 외침을 귀기울여 듣지 못한 ,나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용서받기 위해서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는 의무가 나에게는 있는 것이다. 희생자 가족들과 관계자들의 눈물과 슬픔을 조금씩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게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행복이라는 단어하나를 추구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같은 소시민들의 의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