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게임 이야기

패미콤(FC) 천지를 먹다2 제갈공명전 공략1 - 아군장수 목록

☆북극곰☆ 2014. 7. 8. 10:59


★ 기종: FC

★ 게임명: 천지를 먹다2-제갈공명전
★ 제작사: 캡콥
★ 장르: RPG
 발매일: 1991-04-05
★ 발매가: 8,500엔 
★ 소개: 1991년에 발매된 FC(패미콤)의 삼국지게임. 캡콤에서 발매된 횡스크롤 액션게임인 천지를먹다시리즈와는 달리 드래곤퀘스트 형식의 RPG 게임이다.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언어의 압박이 크지만 게임팬이라면 한번쯤 즐겨야 하는 명작이다.


아군장수 목록 (합류 후 중도이탈하지 않음) -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역대인명사전 참고

(좌)강유: 중국 삼국시대 위의 지략이 뛰어난 사람으로 촉의 신하가 되어 제갈량의 후계자가 되었던 무장. 후에 종회와 함께 사마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자살하였다. 무와 문 모두에 능통한 인재로서 제갈량이 무척이나 아꼈던 인물이다.
(우)관색: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수. 관우의 셋째 아들로 알려져 있다. 제갈량이 남정할 때 선봉이 되어 맹획을 붙잡는데 공을 세웠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는 허구의 인물이다. 민간설화에서 만들어진 인물로 보인다.

(좌)관평: 중국 촉한시대 명장 관우의 아들. 219년 부친을 따라 번성에 주둔하고 있는 조조군을 공격하다 후방에서 공격해온 오나라 손권의 습격을 받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포위되어 유봉과 맹달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맥성을 탈출하다 오나라 장수 여몽에게 생포되어 부친 관우와 함께 참살되었다.
(우)마대: 촉의 장수. 마등의 조카로 마등이 조조의 손에 죽자 사촌인 마초와 함께 숙부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실패한다. 후일 마초와 함께 촉에 귀순하여 많은 공을 세운다. 제갈량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위연이 모반했을 때 그를 죽인다.

(좌)마량: 삼국시대 촉나라 양양 의성사람. 마속의 형으로 자는 계상이다. 형제 다섯이 모두 재주로 이름이 있었는데 그가 가장 어질고 덕이 높았다. 흰 눈썹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사람들이 "마씨의 다섯 형제 가운데 흰 눈썹의 마량이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이 말에서 고사성어 백미가 나왔다. 적벽대전 뒤 유비가 형주를 장악했을 때 불려 종사가 되었다. 제갈량과도 친구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오촉사이에서 벌어진 이릉 전투 때 군중에서 죽었다.
(우)마속: 백미로 유명한 마량의 5형제중 막내동생이다. 이적의 추천으로 유비의 참모가 되어 형주종사로 임명되었다. 제갈량이 마속의 재능을 인정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유비는 말이 앞서는 인물이라 평가했고 228년 제갈량이 북벌정책을 추진하면서 위를 공격하는데 이때 기산에 군대를 주둔하면서 마속이 선봉에 서게 된다. 하지만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다가 위의 장합에게 대패한다. 이 책임으로 마속은 죽음을 당하는데 제갈량이 울면서 마속을 참한다는 읍참마속의 고사가 생겼다.

(좌)마초: 자는 맹기이다. 마초가 후한에 반란을 일으키자 부친 마등이 조조에게 참수당하였다. 한수와 연합하여 조조와 싸웠지만 조조의 계략으로 패하였다. 만족 사람들을 모아 양주를 거점으로 세력을 다시 확장하였으나 시패하고 촉한의 유비에게 투항하여 촉한의 장수가 되었다. 관우, 장비, 조운, 황충과 함께 촉한의 오호대장군으로 불렸다. 222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우)맹달: 자는 자경. 원래 유장의 수하에 있었으나 장송, 법정 등과 함께 유비를 도와 촉을 차지하도록 힘쓴다. 후일 관우를 돕지 않아 문책을 받자 위에 항복하였다. 제갈량이 위를 칠 때 다시 촉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사마의에게 패하여 죽는다.

(좌)법정: 자는 효직. 촉군 태수. 유장의 수하였으나 장송, 맹달과 함께 유비를 끌어들여 그를 섬겼다. 유비가 촉에서 기반을 닦을 때 많은 공을 세웠으며 제갈량도 그를 뛰어난 인재라 칭송하였다.
(우)엄안: 원래 유장 수하의 명장이였다. 촉 평정전에서 고전하던 유비를 돕기 위해 장비가 촉으로 들어갈 때 교분을 맺어 유비를 섬기게 된다. 뒷날 황충을 도와 노익장을 과시하며 조조의 대장 장합과 싸워 연패시켰다.

(좌)오란: 후한 말기 유비의 부장이었다. 원래 유장의 부장이였는데 나중에 유비에게 귀순하였다. 건안 23년 유비가 한중을 탈취했는데 마초를 따라 하변에 주둔하였다. 조조를 추격할 때 조조의 아들 조창을 만나 죽임을 당했다.
(우)오의: 자는 자원이었다. 원래 유장에게 속해 있었는데 그의 여동생이 유장의 형 유모에게 시집가자 유장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 일찍이 유장의 큰아들 유순과 함께 낙성을 지키며 유비에게 저항했다. 건안 19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 그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받아들이고 나중에 황후로 세우니 촉한의 국구가 되었다. 일찍이 제갈량을 따라 북벌했다.

(좌)요화: 자는 원검. 일찍이 관우를 흠모하여 그를 따랐다. 관우가 형주에서 패할 때 촉으로 구원군을 요청하러간 덕분에 죽음을 면한다. 제갈량과 그 뒤를 이은 강유를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우)위연: 장사 태수 한현을 죽이고 유비에게 항복한다. 촉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우나, 늘 불만이 많아 제갈량의 경계를 받는다. 제갈량이 죽자마자 바로 모반하였는데 이에 미리 대비한 제갈량의 비밀 계책으로 마대에 의해서 허무하게 죽임을 맞는다.

(좌)이적: 자는 기백. 유비의 대신. 유비가 유표에게 의지해 있을 때 그를 도운 것이 인연이 되어 유비를 섬기게 된다. 이적이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오왕 손권은 그의 말솜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그와의 대화 중에 언어유희로써 그를 굴복시키려고 했다. 제갈량, 법정, 유파, 이엄과 함께 촉의 법률인 촉과를 만들었다.
(우)장완: 자는 공염. 제갈량, 비위, 동윤과 함께 촉한의 사상으로 꼽힌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고 형주서좌로 역할했으며 광도현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았지만 술만 마시고 방탕하자 유비가 격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제갈량은 장완의 재능을 인정하여 가벼운 처벌만 받게 하였다. 이후 제갈량을 도와 남방정벌, 북방정벌에서 후방을 지키며 물자를 공급하였다. 제갈량이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후임이 되어 대사마에 올랐다. 제갈량이 추진한 북벌을 계속 추진하다가 병환하였다.



(좌)장포: 장비의 큰아들. 장비가 죽은뒤 유비가 관우의 아들 관흥과 함께 둘을 좌우에 데리고 다니며 죽은 관우와 장비를 대신 한것으로 유명하다. 용맹이 뛰어나 여러차례 공을 세웠다. 제갈량도 그를 중하게 썼는데 곽회를 쫓다가 말과 함께 굴러 머리를 다쳤다. 그 상처가 도져 사망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러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에는 허구가 많다.
(우)제갈량: 명실상부한 삼국지 최고의 지략가이자 정치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였다. 유비를 도와 오나라의 손권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와 익주를 점령하였다. 221년 형주의 멸망으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유비 사후에도 촉나라의 대승상으로서 어리석은 유선의 행태도 마다하지 않고 촉을 위해서 죽기직전까지 위나라와 겨루었다.
 
(좌)진등: 자는 원룡이다. 하비국 회포 출신으로 조조의 명을 받아 부친 진규와함께 여포 진영에서 여포 박멸을 위해 비밀리에 활약한다. 책략을 써서 손책의 침략을 재차 격퇴하였다. 동성태수로 전임되어 광릉을 떠난 이후 광릉은 오나라 손권의 지배권에 넘어가고 조조는 진등의 부재로 오나라로 넘어간 것을 안타까워 했다.
(우)황충: 형주 난양출신으로 동한 말년 유표수하에 있었으나 촉한의 유비에게 귀순하였으며 219년 유비가 한중을 공략했을 때에는 정군산에서 위국의 하후연을 죽여 촉한의 승리를 이끌었고 그 공적으로 정서장군에 올랐다. 같은 해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후장군까지 올라 관내후에 봉해졌다. 활을 잘쏘기로 유명하였으며 엄안과 함께 촉의 노장 장수로서 많은 공적을 세웠다.

아군장수 목록 (합류 후 중도이탈하거나 사망) -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역대인명사전 참고

(좌)관우: 자는 운장. 유비,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장수중 한명. 19년 유비의 익주공략때 형주를 지키면서 촉나라의 동방방위를 맡는 등 무력과 위풍이 조조와 손권을 두렵게 하였다. 형주에서 촉나라의 세력확립을 위해 진력하다가 얼마 뒤 손권이 여몽을 보내 형주를 공격했는데, 패하고 사로잡혀 아들 관평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현재도 수많은 관제묘와 재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우)감부인: 유비의 부인. 유비에게는 미부인과 함께 두 부인이 있었다. 미부인은 유선의 생모도 당양싸움에서 조운에게 아두를 부탁하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결한다. 그 후 감부인 혼자 유비를 받들다 적벽대전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좌)관흥: 관우의 아들로 자는 안국이다. 무예에 능해 관우가 죽은 뒤 북벌때 장포와 의형제를 맺고 이릉싸움에서 활약했다. 제갈량과 북벌을 하면서 많은 공적을 세웠고 그의 충성과 용기는 관우에 못지 않아 제갈량이 중용했다. 제갈량의 6차 북벌때 병으로 죽었다.
(우)노소: 위나라의 장수로 유비가 연판장 혈서를 쓰고 원술토벌을 핑계로 도망칠 때 조조가 감시를 위해 붙인 장수이나 유비가 돌려 보냈다. 

(좌)노숙: 오나라의 일급 모사로 사람됨이 온화했다. 주유의 천거로 손권에게 발탁되었다. 유비에게 여러번 사신으로 자청할 정도로 친유비파였다. 적벽대전때에는 주전파로 제갈량과 주유사이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하였다. 주유가 죽은후 오나라 대도독이 되어 관우와 형주의 삼군 문제로 대립하였다. 관로의 예언대로 육구를 지키다 병사하였다.
(우)문추: 원소 막하의 용장. 백마의 전투에서 조조의 장수 장요, 서황을 상대로 싸워 장요를 쏘아 말에서 떨어지게 하였으나, 조조에게 얹혀 있던 관우에게 죽임을 당한다. 본시 안량과 함께 원소의 자랑하던 장수였는데 정사에서는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만 나온다.

(좌)방통: 유비의 부군사로 일찍이 수경선생 사마휘가 봉추라 불렀던 인재. 제갈량과 함께 둘중 한명만 얻어도 천하를 재패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지략가. 적벽대전에서는 주유의 부탁을 받고 조조를 꼬여 연환계를 성공시켰고 서서에게 계책을 주었다. 후에 노숙과 제갈량의 천거로 유비의 군사가 되어 서천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의의 예언대로 낙봉파에서 장임의 난전을 맞고 젊은나이에 요절하였다. 그의 죽음을 유비와 제갈량이 무척이나 안타까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방통이 살아있었다면 제갈량과 함께 일찍이 촉이 삼국을 통일 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지배적이다. 용모와 재능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음을 증명한 인물로 꼽힌다.  
(우)안량: 문추와 함께 원소 막하의 용장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백마전투때에는 조조의 막하에 든, 본시 여포의 대장인 송헌, 위속을 차례로 베어 조조진의 두려움을 샀다. 그러나 조조에게 위탁하던 관우에게 손한번 써보지 못하고 목이 베인다.

(좌)유비: 촉한의 초대 황제. 자는 현덕.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15세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고 호혐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 장비를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환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도당을 모아 그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후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유표가 죽고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할 무렵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얻어 적벽대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후 형주를 확보하여 촉 건립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그의 아들 유선이 두번째 촉황제를 이어 받은뒤 제갈량과 강유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촉은 멸망한다.
(우)장비: 유비, 관우와 의형제를 맺고 평생 의를 지킨 인물이다. 평생동안 싸움터를 전전하며 수많은 공을 세웠는데 특히 장판교에서 단기필마로 조조의 100만대군을 물리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여포, 마초등과 좋은 싸움을 벌였고 서촉을 취할때에는 파군성의 엄안을 의로 대하여 귀순시키기도 하였으며 한중을 취할 때도 와구관에서 장합을 맞이하여 지혜롭게 싸워 이를 물리친다. 촉의 오호대장군중 한사람이며 후에 관우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과음하다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한다. 장팔사모를 사용하였다.

(좌)주령:
조조 막하의 장수. 유비가 원술을 맞아 싸우러 갈때 노소와 함께 조조가 감시역할로 따라 보냈으나 원술을 멸한 뒤 유비는 그의 군대를 차지해 독립하고 그는 맥없이 돌아갔다. 뒷날 마초가 장안성을 뺏고 동관을 웅거하였을 때는 서황과 함께 그의 퇴로를 끊었다. 청하군 출신.
(우)뇌동: 원래는 유장 휘하의 장수로 오의와 함께 유비군을 막지만 포위되어 항복했다. 파서의 수비에 종사하면서 한중 와구관싸움에서 장비의 부장으로 활약했으나 위의 장수 장합의 계책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다.

아군장수 목록 (특정조건을 만족해야만 합류) -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역대인명사전 참고

(좌)양회: 서촉 유장의 수하 용장. 장노의 침입을 막으려 유비를 불러들였을 때 백수도독으로서 부수관을 지켰었는데 유비가 회군하겠다는 말을 곧이 듣고 전송하는 척하고 찾아가 기회를 보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도리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우)여포: 명실공히 삼국지 최고의 무장중 한명. 그 힘은 천하를 호령하고 유비,관우,장비와의 3대1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조및 조조 휘하의 맹장들과도 겨루어 한치의 밀려남이 없었기에 조조에게도 골칫덩어리였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무력에 비해서 어질지 못하고 어리석어 수많은 책략과 전술에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초선때문에 동탁을 배신한 일화는 삼국지의 유명한 일화중 하나.
 
(좌)장로: 한중의 영주. 패국 풍현사람. 조부 장릉때부터 도교의 교주 격으로 한중을 다스려왔는데, 마초에게 패주한 뒤, 조조의 공격이 목전에 닥친것을 깨닫고, 군사를 움직여 서천을 빼앗아 기반을 삼고 이에 대비하기를 꾀하였다. 그 때문에 서촉은 유비를 불러들여 주인이 바뀌게 되었고, 자신도 조조를 막아 싸우다가 지쳐 항복하고 말았다. 그 뒤론 산중에 들어가 도교 교수로서의 지위만 유지하였다.
(우)장소: 손권의 모사. 팽성 사람으로 자는 자포. 손책이 원술에게서 돌아올 때 주유의 추천으로 그의 막하에 들었다. 본시 문신이라 사람됨이 소심하고 침착하여 적벽대전을 앞에두고 사리를 들어 신중론으로 조조에게 항복하기를 주장하다가 실패하였으나 매양 소극적인 입장에 서서 경솔한 정책을 간하였다. 손권이 형주를 되찾고자 출병하러 하였을때는 유장과 장로에게 동시에 사신을 보내 유비를 고립시키는 꾀를 내었다. 손책이 죽을 때는 손권을 보호하라는 유촉을 받았으며 손권도 그를 높이어 장공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다. 죽은 후 문후라 시호하였다. 

(좌)전위: 용모가 당당하고 완력이 세며, 강한 지조와 의협심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진류태수 장막의 부하였으나, 진지 군사와 충돌해 수십 명을 죽이고 산중으로 도피생활을 하던 중, 마침 호랑이를 쫓고 있는 광경이 하후돈에게 띄어 조조에게 추천된다. 그후 여포에게 두 번이나 포위당한 조조를 구해냈으며 황건적 토벌 때에는 허저와 단기필마로 싸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일부러 져주라고 명령한 뒤, 결국 허저를 유인해 함정에 빠뜨려 아군으로 만든다. 완에서 장수가 항복하자 전위는 조조와 함께 그곳에 주둔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참모 가후의 책략으로 조조를 기습한다. 이때 전위의 무용을 두려워해 미리 부관 호거아에게 명령하여 그를 술에 곯아 떨어지게 하고, 무기인 쌍철근도 빼앗아 두었다. 이상한 기미를 눈치챈 전위는 조조를 도망가게 하기 위해 정문에서 사자처럼 분전한다. 수십 군데나 상처를 입으면서도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고, 적병 두 명을 양팔에 끼고 죄어 죽였으나, 상처가 깊어 입을 벌리고 눈을 부라린 채 큰 소리로 적에게 고함지르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무음으로 도망간 조조는 전위의 소식을 듣고는 대성통곡했다 한다. 전위는 매우 충직하며 신중했고, 항상 낮에는 종일 조조 곁에 서서 대기했다. 조조는 훗일을 돌아볼 때 '내 생애 애석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봉효를 잃은 것이며, 하나는 전위를 잃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우)하후돈: 조조의 상장으로 조조와 사촌지간이다. 하후연(夏侯淵)과 처음부터 따라다녀 누차 전공을 많이 세웠다. 제갈공명의 첫 싸움지인 박망파에서 대장으로도 출전했었으며, 특히 여포와의 싸움에서 조성의 화살에 왼쪽눈을 맞았으나 '부모의 정이 뭉친 몸을 버릴 수 없다'라며 화살을 뽑아 눈을 삼키는 용맹이 유명하다. 거의 반평생을 애꾸눈으로 싸움에 임하였다. 조조에게 높은 신뢰를 얻었으며 조비의 대에 이르러서 대장군에 올랐다.



(좌)주유: 손책과 죽마지우 사이였다. 젊어서부터 도략이 넓고 장수재목이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수전에 능했으며 손책이 강동을 차지했을 때 이미 건위중랑장을 맡고 있었다. 손책의 사후 병권을 잡고 적벽에서 조조를 화공으로 대파시켜 이름을 크게 떨쳤다. 유비를 경계하며 미인계를 쓰기도 하고 제갈량과 대립한다. 젊은 나이인 36세로 요절하였는데 강동의 절색인 소교의 남편이었다. 죽으면서 '하늘은 왜 주유를 탄생시키고 또 제갈량을 탄생시켰나?' 라는 말이 삼국연의에 전한다. 용모가 수려하여 '미주랑'이라고도 불리었다.